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킴브리 전쟁 (문단 편집) === 초기 로마군의 패배 === 기원전 113년 로마는 게르만족에게 정착할 곳을 주겠다고 속여 그들을 노레이아로 유인하고, 기습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기원전 113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이끄는 로마군은 오히려 게르만족에게 참패해 10,000명이 전사하고, 2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노레이아 전투'''). 카르보는 로마로 귀환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탁월한 웅변술을 갖췄기에 '''오라토르'''(Orator, 연설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으며,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조부였다.]의 고발을 받고 재판에 회부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아 유배될 위기에 몰리자 독약을 삼키고 자살했다. 하지만 게르만족은 알프스 산맥 북쪽을 따라 계속 서진했고, 중간에 스위스 북쪽에 거주하던 헬베티족과 동맹을 맺었다. 로마는 비로소 게르만족의 위력을 실감했고, 이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약탈을 하기 전에 이탈리아 밖으로 원정군을 보내기로 했다. 기원전 109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기원전 109년 집정관)|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과 맞섰으나 패배했고, 기원전 107년에는 집정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07년 집정관)|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부르디갈라 전투'''에서 티구리니족에게 패배해 전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